2009/01/03 11:40 else
우리 집에는 테레비가 없습니다. 이 얘기를 하면 대부분 사람들은 '아이들 때문에' 테레비를 치웠을 거라 생각하고 그 쪽 방향으로 대화가 이어지게 됩니다. 아이들에게 유해한 테레비 프로나 뭐 이런 얘기들 말입니다. 제가 테레비를 치우자(아니 치워버리자)고 얘기했을 때, 와이프도 아이들 이유 때문에 찬성을 했습니다. 그런데, 제 진짜 본심은 아이들이 아니라, 어른들, 그 중에서도 제 자신이 더 큰 이유였습니다.

저로 말할 것 같으면 남들 못지 않은 테레비 중독자였습니다. 특히, 집에 혼자 있는 시간이나 가족들이 모두 잠든 시간에는 습관적으로 테레비를 틀어 놓고 시간을 죽이거나 그대로 잠들어 버리는 그런 꽈였습니다. 그런데, 테레비를 사랑하거나 예찬하는 류는 또 아닙니다. 짝짓기 오락 프로 이런 거는 보면서 신나게 웃다가 이거 뭐 내가 제내들 노는 걸 보고 앉아 있네 뭐 그러면서 딴데 돌려버립니다. 뉴스를 보다가 아이씨 이거 뭐 좋은 소식은 하나도 없고 기분만 드러워지는 이걸 꼭 봐야해 이런 생각이 들다가, 그래도 이거 끝나야 스포츠 뉴스 나오니까... 뭐 이런 식입니다.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티비 프로중에서 가장 유해한 프로가 뉴스입니다. 현실에 라이브 중인 전쟁과 살인 등등을 아주 구체적으로 반복해서 전달해 주고 있으니 말입니다. 같은 내용을 다루지만 현실이 아닌 영화보다 차원이 다르게 유해한 물질입니다. 마이클 무어 감독이 만든 다큐 영화 '볼링 포 컬럼바인'에서는 미국에서 심심찮게 일어나는 총기 난사 사건의 원인에 대해서 폭력성이 있는 영화나 게임, 메릴린 맨슨 같은 Rock 음악 보다 미국이 전세계에서 '항상' 저지르고 있는 실제 살인-전쟁-과 그 전쟁 소식을 끊임없이 보도하는 뉴스들을 원인으로 암시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얘기가 좀 샜는데요. 이 포스트는 주저리입니다. 제목을 보세요.

아무튼 이런식으로 욕을 하면서도 '나도 모르게' 리모콘을 돌리고 앉아 있는 그런 평범한 테레비와의 관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스포츠나 영화가 그래도 깔끔한데, 항상 보고 싶은 게 나오는 것도 아니고,  또 식구들과 채널 다툼을 하는데 제 욕심을 관철시키는 그런 류의 아빠는 제가 또 아닙니다. 아무튼, 테레비 없이 살아본 적은 제 인생에서 없었습니다. 군대에도 테레비는 있습니다. 심지어 오대수가 15년동안 같혀 있던 사설 감옥에도 테레비는 있었잖습니까.
그리고, 어느 순간 이게 좀 지긋 지긋해졌습니다. 그리고, 와이프에게 얘기를 했습니다.

나 : (나는 욕을 하면서도, 기분이 별로 좋지 않으면서도 테레비를 보고 앉아 있는 이 이상한 시츄에이션이 싫어. 정말 볼만할 가치가 있는 일주일에 한번쯤 있는 두시간 짜리 프로 때문에 매일 두세시간씩 습관적으로 보고 앉아있는 네 자신이 싫어...... 라는 말은 생략한 채로) 우리 테레비 치워버리자!!!
마누라 : 그래. 아이들은 테레비가 없으면 책을 볼거야!!!
이렇게 성사가 되었고, 결행했습니다.

테레비를 끊는다는 것이 담배와 비슷합니다. 손으로 드르륵 드르륵 돌리던 채널.(채널을 바꾸기 위해 돌리던 손잡이를 우리는 그냥 채널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채널이 빠져서 뺀찌로 채널을 돌리던 14인치 흑백 테레비로 부터 시작해서.... 아 갑자기 우리 옆집에 가서 처음으로 칼라 테레비를 봤을 때의 그 부러움과 감동이 기억납니다. 길을 가면서 칼라 테레비가 있는 집과 없는 집을 헤아려 보던 기억도 나구요. 어떻게 아냐구요? 지붕 위에 안테나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흑백용과 칼라용이 달랐거든요. 또 샜다. 주저리니까요.

아무튼 테레비 끊기는 담배 끊기와 비슷합니다. 삼십년 넘게 몸에 밴 습관을 인생에서 도려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행이 두렵습니다. 이런 식으로 살아 본적이 없는 인생의 새로운 국면이랄까. 근데 아예 테레비를 버려 버리면 다시 사는데 돈이 너무 많이 드니까 담배보다는 성공률이 높겠죠. 우리 집의 경우는 뭐 버리지는 않았고, 창고 깊숙히 집어 넣었습니다. (그나마 얼마전 닌텐도 wii를 사서 다시 나왔습니다. 케이블만 창고 깊숙히 쳐박혀 있어서 시청불가 상태입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집에는 테레비가 없다'는 첫문장은 정확한 표현이 아니군요. 새겨 들으시면 됩니다.)
아무튼 그렇게 테레비를 치워 버리니까요... 테레비의 빈자리 이거 정말 큽니다. 테레비가 집안에서 차지하는 물리적, 심리적 위치를 보면 테레비가 얼마나 신성한 대접을 받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한 집안 거실의 가장 널직하고 전망 좋은 벽면을 등지고, 고급스러운 재단위에 신주 단지 처럼 올려져 있는 테레비. 먼 훗날 고고학자들이  집집마다 같은 위치에 놓여있는 테레비를 발견하고 종교적 의미를 부여할지도 모르겠다는 상상도 스칩니다.

테레비의 빈자리 벽면에는 전원 콘센트 단자에, 케이블 연결 단자, 지금 보니 랜선 단자도 있네요. 테레비를 치우면 이런 단자들이 흉터처럼 드러납니다.  그리고, 참 난감할때가 손님들이 왔을 때입니다. 손님들을 초대하고 식사가 준비되기 전 테레비가 없으면 정말 뻘쭘해질 때가 많이 있습니다. 테레비가 발명되고서부터 집안에서 사람들은 마주 보지 않는 것이 관례가 되었습니다. 나란히 테레비를 향해 앉아서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대화를 나누는 것이 테레비 출현 이후의 관례입니다. 재밌는 것이 손님들을 초대해 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테레비가 없는데도 테레비가 있어야 할 벽면을 향해서 앉아있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있어야 할 테레비는 없고, 흉터처럼 드러난 단자들만 있는 것이죠. 그래서 뻘쭘한 분위기가 연출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근데, 새삼 이런 테레비에 대한 얘기를 꺼내게 된것은.... 음, 다시 테레비를 놓을까. 뭐 정확히 말하면 케이블만 연결하면 됩니다. 그런 생각이 요새 좀 쎄게 듭니다. 마누라님 방송국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그지 같은 화질로 드라마 보는 것도 안스럽고, 아들 녀석이 야구를 좋아하는데 좀 있으면 하게될 WBC 중계도 인터넷 아프리카 TV로 보게 될 거 같아 좀 미안하고 그렇습니다. 문제는 테레비를 켜면 불쾌하고, 한심하고, 좋지도 않은 별책 부록들이 같이 딸려 나온다는게 그게 문제라서 말입니다. 그게 좀 그렇습니다. 주저리 주저리 이상 마치겠습니다.
posted by 심보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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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오대수가 15년동안 같혀 있던 사설 감옥에도 테레비가 있었던 이유가
    바로, 형이 텔레비젼도 아닌 티비도 아닌 테레비를 치우려 했던 이유가 되지 않을까 싶은데요.

    이건 참고로 말씀드리는 건데요. 우리집은 방마다 케이블 단자 연결해서 좀 큰 모니터로 티비 프로그램 볼 수 있어요. 인터넷 연결 안하고도요... ㅋㄷㅋ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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